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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마사상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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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보림사 댓글 0건 조회 1,407회 작성일 21-03-15 14: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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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마사상에 대하여

추천 0 조회 7 07.06.18 00:56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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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시글 본문내용
달마대사의 선사상을 말하기에 앞서 꼭 필요한 선의 줄거리부터 말해 봅니다. 선은 JHAN의 음역이며 선나(禪那)로 번역되며 선정(禪定)이라고도 한다. 그 의미를 살펴보면 고요히 생각한다는 정려(靜慮), 생각을 닦는 다는 사유수(思惟修), 모든 악을 버린다는 기악(棄惡), 모든 공덕의 총체라는 공덕총림(功德叢林) 등의 의미가 있습니다.

고대 인도의 선은 구도(求道) 고행자들이 안으로는 명상을 하면서 고행을 한 것으로부터 유래합니다. 이러한 것이 지관(止觀)을 균등하게 닦는다는 것에서부터 출발하여 불교의 삼학(三學)인 계(戒), 정(定), 혜(慧) 중의 하나인 정(定)을 선(禪)이라고 하였으며 불교도가 수행하는 여덟 가지와 여섯 가지 덕목 가운데 정사유(正思惟)와 정념(正念)과 정정(正定) 그리고 선바라밀이 이에 해당되는 것입니다.

옛날 당나라 규봉선사는 선(禪)은 부처님의 마음이며 교(敎)는 부처님의 말씀이고 계율은 부처님의 행실로서 불교 3대 목적의 하나이며 최고 목적을 지향하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이러한 선(禪) 가운데에서도 부처님께서 직접 말씀하신 가운데 있는 선을 여래선(如來禪)이라고 하며, 그 전이나 그 후 부처님에 의해서가 아니라 부처님의 제자들이 깨달은 경지를 선의 경지라고 하였습니다.

물론, 넓게 말하면 부처님의 49년, 8만대장경 모두가 선이 아닌 것이 없고 꼭 선을 찾아내려면 선이란 문자나 형식을 떠나서 마음이 마음을 닦아 찾기 어려운 마음을 찾아 그 마음을 마음대로 하는 것이므로 하나가 아니며 또한 그 모든 것도 아닙니다. 그러나 선을 아는 경지에서 보면 선밖에 그 무엇도 없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경전 속의 부처님 말씀가운데 선이라 할 수 있는 것을 여래선(如來禪)이라 하며 그 전이나 그 후 달마대사나 마음 닦은 불자들이 말한 선의 정의(定義) 가운데 최고 문제를 가리켜 조사선(祖師禪)이라고 하였습니다.

부처님의 말씀은 끝없는 시간세계를 두고 고루고루 두루 널리 하신 포괄적 선언이며 조사(부처님의 이치를 안 고승)들은 그때 그때 수행자들을 상대로 막힌 구석으로 인하여 바른 마음을 쓰지 못할 때 해결방법을 즉시 밝혀주는 신기하고도 통달된 것입니다.

선 자체를 두고 여래선(如來禪)과 조사선(祖師禪)을 구분할 수는 없지만 선을 목적으로 하는 사람은 그 나름대로 격에 의하여 선택할 수 있는 것입니다. 부처님 당시만 하더라도 대개의 불제자들은 부처님을 친견하기 쉬운 여건으로 큰 노력을 곁들이지 않고도 깊은 진리를 체득(體得)할 수 있었고 그러기에 사람들이 격도 높았고 수준도 있었으며 그대로 믿을 수 있었기에 깨달음도 빠를 수밖에 없었습니다.

지금도 사람들의 수준은 별다르지 않으나 선을 닦는 주위의 여건과 신념의 격차, 바른 지도력의 불충분으로 조사선(祖師禪)이 선수행을 하는 사람들에게 최상의 지름길이라고 합니다. 이에 반해 여래선(如來禪)은 자신들의 연구에서부터 그 기조를 두었기 때문에 믿음이 깊지 않다는 차이점이 있습니다

선의 종지법문으로 세 가지가 있는데 그 첫째는 부처님께서 아함경을 설하실 때 제가 가섭이 늦게 도착하자 부처님께서는 앉으신 자리를 절반으로 비켜주셨습니다.

다음으로 영산회상에서 설법하시는 부처님께 누가 꽃을 올리자 부처님은 꽃가지를 들어 여러 사람에게 보이셨습니다. 아무도 그 뜻을 알지 못했는데 유독 수제자인 가섭존자만은 빙그레 웃었다고 전합니다. 그러자 부처님께서는 당신이 가진 최고의 바른 법인 정법안장(正法眼藏) 열반묘심(涅槃妙心)을 이심전심(以心傳心)으로 가섭에게 전하노라 하셨습니다.

끝으로 부처님께서 80세 되던 해 2월15일, 밤중에 예언을 마치고 최후의 선정(禪定)에 드셨습니다. 부처님의 임종이 알려진지 이레 째 되던 날, 가섭존자가 부처님의 황금관을 세 바퀴 돌면서 예를 드리려 하자 부처님께서 관 밖으로 발을 내밀어 보이셨다고 합니다. 이것이 부처님의 불입문자(不立文字), 교외별전(敎外別傳), 이심전심(以心傳心), 직지인심(直指人心), 견성성불(見性成佛)의 법문내용입니다.

위의 세 가지 법문처럼 선이란 말과 표시로서만 소통되는 것이 아니라, 아무도 알지 못한 뜻을 가섭존자만이 알았듯이 이심전심(以心傳心)으로 그 이치를 주고받는다고 하는 것입니다.

대장경의 말씀으로 부처님께서 설법을 하러 법상에 오르시자 제자문수가 종망치로 종소리를 울리며 "부처님 진리의 왕의 설법은 이렇습니다" 하여 부처님도 설법을 마쳤다고 합니다.

잡아함경에는 어떤 이가 부처님께 묻기를 "어제는 무슨 법을 설하셨습니까?" 하자,
부처님 말씀하시길, "일정한 법을 말했노라"
또 묻기를, "오늘은 무슨 법을 말씀하셨습니까?"
대답하시길, "정하지 않은 법을 말하노라".
그러자, "어제는 일정한 법을 설하시고 오늘은 정하지 않는 법을 설하시니 그 일이 어떠한 것입니까?"
대답하시길, "어제는 일정한 것이고 오늘은 일정하지 아니 하였노라. 이런 것을 여래선(如來禪)이라 말하리라" 하셨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부처님께서 수도승으로서 보리수 아래에서 별을 보고 깨달으셨던 것처럼 많은 마군을 항복받고 제거 하셨다는 것도 바로 선사상입니다. 이렇게 보면 설산에서 6년간 고행사하신 것도 선이요, 밤중에 성을 넘어 출가하신 것도 선이요, 그 이전 태자시절 궁전에서 마음에 가지신 것도 모두 선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태어나실 때 일곱 걸음 걸으시고 사방을 돌아보시며 한 손으론 하늘을 가리키시고, 또 한 손으로 땅을 가리키며 천상천하(天上天下)에 나만이 높다고 하신 것도 선인 것입니다. 더욱 거슬러 올라가 흰 코끼리를 타고 마야 부인의 모태에 드신 것도 선이듯 부처님 나시기 이전, 그 모든 것도 선 아닌 것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태자궁에 태어나시기 전에 중생을 제도해 마치셨고 도솔천으로부터 오시기전에 이미 왕궁에 내리셨다는 말이 시공을 벗어나 한 생각으로 보면 바로 그 말이 아니겠느냐, 그러므로 지금의 많은 수행자들도 이론이 복잡하고 밝은 스승을 찾기 어려울 땐 부처님, 경전 말씀대로 여래선(如來禪)이건 조사선(祖師禪)이건 보기도 하며, 어떤 선은 연기를 돌이어 추억하기도 하며 명상이라기보다 삼매(三昧, 마음이 집중되어 통일 된 상태)를 지속하는 것을 조사선(祖師禪)이 생기기전의 수행사실에서 많이 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문자를 주장하지 않고 바로 마음으로 깨닫는 도리를 발전시켜 부처님의 말씀을 이런 목적에 두고 한계가 정해진 생명의 비운을 자책하며 보다 더 밝은 선각자를 찾으려는 것이 바로 선종의 기원입니다.

멀리 서역의 달마가 넓은 중국 땅으로 건너온 초기엔 이미 먼저 들어온 여래선(如來禪)을 불경과 법도에 따라서 최고의 목적으로 하여 수행의 지침으로 삼았습니다. 너무나 두드러진 선각자이신 달마대사는 당시 많은 불제자들의 불교관을 혁신하고 부처님 설법 밖의 불법을 전하려 하였으며 여래선(如來禪)이 아니라 조사선(祖師禪)이라는 달마선(達磨禪)을 선포하였던 것입니다.

달마대사가 중국 땅에 도래한 당시는 일반 교학을 연구하는 불교가 융성하였고 여래선(如來禪)이 확산되어 그 사상을 지배하고 있었습니다. 이른바 요즘 말하는 위빠사나라고 하는 오정심관(五停心觀)과 사념처관(四念處觀)이라는 것입니다.

달마대사는 그러한 인식의 토대 위에서 이미 뿌리 내린 선적인 사고를 일축하고 '불입문자(不立文字), 견성성불(見性成佛)'이라는 기치를 내걸으셨는데, 그분의 행적이나 기록들은 {달마밀록}이니 {혈맥론}이니 {관심론}이니 {이입사행론}이라고 하여 선사상사를 소개한 책자 등에 남겨져 있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 가운데 {달마비록}은 유실되고 달마대사의 진서(眞書)로는 {혈맥론}과 {이입사행론}이라고 합니다.

하여튼 부처님의 말씀을 기조로 하여 뿌리를 내린 선 세계에서 너무나 독특한 조사의 갑작스러운 출현은 그 시대로 하여금 수용할 수 없는 거부상태를 일으키게 했습니다. 그리하여 몇 번이나 생사 시험을 당하면서 전달마, 금달마, 후달마라는 한 사람의 자취가 세 사람으로 분류된 '삼달마일체 달마설의 역사를 전하게 되었습니다.

원래 인간 달마대사는 남인도 향지 국왕의 세 번째 아들로서 귀족의 혈통을 지닌 왕자였다고 합니다. 당시 왕궁에 초대되었던 남인도의 27대 불제자 반야다라존자로부터 전해 받은 28대 선의 종주라고 외침으로서 당시의 불교계에서 놀라운 이단자로 지목되어 어려움을 겪기도 했으나, 그가 주는 신비한 3달마기적으로 인해 새로운 조사선(祖師禪)이 그의 설법요지 부분을 취하면 문자에 의지하지 아니하고 그 마음을 알고 행사하면 그것이 바로 부처님의 행이라고 하였습니다.

말로서 하자니 부득이 이런 말을 쓰지만 그 경지에 이르려면 마음이 무딘 이는 무척 오래 걸릴 것이고 영특한 이는 빨리 도를 깨달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면 그것은 무엇인가? 바로 죽고 사는 것을 마음대로 하며 시간 세계에서 측량할 수 없이 잠깐에서 때묻은 마음씨의 껍질로부터 벗어난 것입니다. 만약 거기에서 부처님이 되려고 한다면 부처님같이 오랜 인연행사로 인해 쌓은 결과가 뒷받침되어야 하며 덕목이 바탕되야 합니다.

부처님 이외에도 그 목적지인 죽고 사는 것을 거리낌없이 행사할 수 있으면서 마음의 때, 번뇌에 구애받지 않는 것을 선에 통달한 사람들의 경지라고 합니다. 달마대사가 주장한 선사상은 약 천년세월을 겪는 동안 결과를 맺어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선각자를 배출하였고 여래선(如來禪)이 달마선(達磨禪)으로 변했듯 달마선(達磨禪)이 다시 조사선(祖師禪)인 간화선(看話禪)이나 묵조선(默照禪), 염불선(念佛禪)으로 발전하게 되었습니다.

지금 대승불교권 승려들은 최상의 수행과제가 바로 이 달마선(達磨禪)을 바탕으로 한 간화선(看話禪)인 것입니다. 이 간화선(看話禪)은 굳이 여래선(如來禪)이나 달마선(達磨禪)과 비교를 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대하는 직접적인 언동이전의 경지에서 이치를 쟁취하는 더 발달된 선의 방법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간화선(看話禪)이 어렵기도 하며 힘든 구석도 많고 다른 사람의 가리킴을 따르다 보면 쉽게 질러가는 길이 될 수도 있는 것입니다. 때문에 여래선(如來禪)이 지적하는 가르침 속에도 간화선(看話禪)이 있고 달마선(達磨禪)이 주장하는 속에도 이 간화선(看話禪)은 소통되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여래선(如來禪)에서 해탈한 경지 가운데 삼해탈(三解脫), 팔해탈(八解脫), 팔승처(八勝處), 십변처(十遍處) 등이 있습니다. 이를 뭉뚱그려 간략하게 주제를 설정하면서도 당시 상황에 맞게 구체화한 것이 바로 간화선(看話禪)이나 묵조선(默照禪), 염불선(念佛禪)인 것입니다.

그러면 여랜선의 진원지는 부처님으로 거슬러 올라가고 달마이후의 1119인이 적어 놓은 {전등록}이나 {선문염송}이라는 선에 대한 게송(偈頌)을 주종으로 설두중현스님의 백가지 선문답 법칙인 {송고백칙}과 {벽암록}, 그리고 원오극근스님의 선종사가 등과 무문혜개(無門慧開)의 {무문관(無門關)}, 우리 나라의 {선문찰요} 등이 선이 발달했던 시대 오종가풍(五宗家風)의 진수를 적어둔 책들이 선의 큰 지침이 되고 있습니다.

달마대사의 28대 조사유법이 중국 최초의 선사가 된 것이며 후에 5조, 6조에 이르러 혜능대사가 나타나 남북선종 중 아주 간결하고도 강력한 남돈선종을 선포하여 이후 당말 오대를 거쳐 송대에 이르러 정리된 것이 바로 1700여 가지의 간화선(看話禪)입니다.

선의 이치가 알려져 그 중 편의에 따라 혹은 선택하여 주시는 선사의 위치에 따라 간화선을 하게 되는데 어떤 이는 불교의 참된 이치를 물으니 "뜰 앞의 잣나무"라 하였고 또 누가 물으니 "마른 똥막대기"라 하기도 했고 "삼세근"이라고도 했습니다.

6조대사는 사람의 생기기 이전부터 끝까지 사람행사를 하게 하는 원인뿌리를 지적하기 위함인지 "이 뭣꼬?"를 힌트로 의심하고 또 의심하여 가면 아는 날이 의심의 비중에 따라서 아는 도리를 측량할 수 있다 하였으니 그 뒤 6조대사의 제자들이 여러 갈래로 갈라져서 방법이 색다른 다섯 가지 가풍의 선이 정립된 것입니다.

그 시기에 조주스님이라는 여래선과 조사선의 후계자 선승이 있었는데 어떤 스님이 그에게 묻기를 모든 생명이 부처가 될 본질을 가졌다면 저 개는 부처님과 다름없는 본성을 지녔습니까? 하고 묻자 조주스님은 "무(無)"라고 하였다고 합니다.

참다운 물음에 당찮은 대답이 튀어나오자 당황한 그는 부처님을 대행하는 조주선사가 거짓말을 하지는 않았을 것이라 생각하여 큰 의심을 가지게 되었고 마침내는 이 화두(話頭)로 무거운 번뇌의 굴레에서 벗어나고 생사를 해탈한 깨달은 이가 되었다고 합니다.

그것이 큰 영향력으로 부각되어 한국에서 조계종의 주류를 이루는 선사상으로 거의 모두가 이 화두로 선을 성취한 이가 많다고 합니다. 하지만 이러한 방법으로서야 1,700여 가지 중 그 어느 것이 다르겠습니까?

"만법이 하나로 돌아가면 하나는 또 어디로 돌아가는 고"라든지 "한 입으로 서강의 물을 다 마시면"이라든가, "너 속에 표없는 참사람이 있다"라든가, "꿈도 생각도 없이 너를 찾아보아라"는 등 여러 가지로 방법을 묻는 수행자들에게 마음갈래의 미치지 않는 곳의 장벽까지도 뚫어야 할 정도의 답답한 대목만을 불쑥 제시하는 것이 선승들의 대답하는 버릇이고, 또 이렇게 여러 가지 고된 시련을 겪으면서 싸우고 다듬질된 것이 많은 선각자들의 점검을 거쳐 이루어진 선승들의 길이라 할 수 있습니다.

지금이라도 이 특출한 달마선이 제시하는 바 사상이 세상을 온통 진동시킬 수 있다면 도체에서 생불이 튀어나올 것이며 설혹 한 부처님만이라도 참답고 바르게 태어나오신다면 그 은덕을 무엇에다 비유할 수 있겠습니까!

또한 이런 기대까지는 걸 수 없다 하더라도 인간성 속에 잠재된 불성을 개발할 도리가 알려져 물질문명과 배금 향락 사상이 만연된 비운에서 희생될 죄의 인간으로 보지 않고 시공을 벗어나 진정한 진리를 행사할 수 있는 것이 사람이외에는 아무 것도 없다고 한다면 우리의 인생관에서 선 생각이 서려있음은 얼마나 다행한 일이겠습니까?

설사 이런 깊은 경지에까지는 미치지 않더라도 불생불멸(不生不滅)하는 심성존재의 영원성에서 보면 미완성 중생의 부처님도 완성된 부처님의 경지에까지 거리를 축소하면 잠깐 사이에 으르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넓게 말하면 선사상이 주는 나름대로의 의미는 모든 생활면이나 인간 행사 면에서 무엇보다도 바른 도움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선은 백가지 착한 일을 대표하는 일이요, 선의 성공적인 길은 만가지 즐거운 목적을 달성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이런 까닭에 선은 문자를 떠나고 형식을 초월하여 마음에서 마음으로 전해지다 보니 의미 해석의 필요성을 느끼게 되었고 불교라는 넓고 큰 분야가 구색을 갖추기 위한 배경으로 등장하였다고도 할 수 있겠습니다.

혹자는 선만으로는 불교가 될 수 없다고 하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심신단련을 위한 갖가지 요가나 정신세계의 공허감을 해결해 주는 관선일부의 명상들도 선의 분야별 삼매경지의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인도의 전통 수행법인 요가의 유상삼매와 무상삼매, 또는 아공(我空)을 닦는 소승선(小乘禪)의 우부소행선(愚夫所行禪), 아공(我空)과 법공(法空)의 이무아(二無我)를 닦으면서 법(法)의 무성(無性)을 닦는 관찰의선(觀察義禪), 이무아(二無我)를 더욱 꿰뚫어 보면서 염(念)도 허망하여 없다고 닦는 반연여선(攀緣如禪), 불과(佛果)를 이루고 법락(法樂)을 받아 모든 중생을 위해서 불가사의(不可思議)한 묘용의 완전한 정신세계의 완성을 추구하는 자증성지(自證聖智)의 여래선(如來禪) 등입니다. 이를 규봉종밀스님은 외도선(外道禪), 범부선(凡夫禪), 소승선(小乘禪), 대승선(大乘禪), 여래최상승선(如來最上勝禪)으로 구분하였습니다.

이러한 선은 중국의 조사선(祖師禪)에서도 수행방법의 분야별로 구분하면 쉬운 말로 아무 것도 생각지 않고 무심(無心)의 상태에서 있는 그대로를 알고 있을 따름이라는 묵조선(默照禪), 어떤 문제 거리를 놓고서 그것에 몰두해 들어가서 의심(疑心)의 덩어리가 확트임을 구하는 화두선(話頭禪) 또는 간화선(看話禪), 부처님이나 보살의 이름을 찾고 그 존엄에 희열에 집중되어 관상하면서 그 관상하는 존재인 나는 무엇인가 하는 염불선(念佛禪)등이 있습니다.

또 하나로부터 많은 숫자에 이르기까지, 많은 숫자로부터 하나의 전원지에 이르기까지 피었다 감았다 하며 숨결을 조정하는 것을 지관선(止觀禪)이라고 합니다. 그 외에는 언제나 잡념으로 산란한 마음을 쉬고 한 생각 일어나지 않는 곳으로 정착해가는 일행(一行)선도 있겠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들은 간절한 마음과 통분한 마음과 용맹있는 의지력으로 애써 마치 고양이가 쥐를 잡을 때처럼 그 어느 것에도 관심을 두지 않고 오로지 목적물인 쥐가 잡히게 하는 것과 비슷한 것입니다.

또 암탉이 알을 품으면 병아리가 깨어 나올 때까지는 주위의 어떤 방해에도 아랑곳없이 따사로운 기운을 알자리에 스미게 하는데 왜하면 약간이라도 찬 공기가 들어가면 알은 썩고 말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굳은 원력으로 갖은 악조건을 다 겪으며 이루어 가는 것을 선사상사에서는 수행의 관문이라고 설명합니다. 이렇다보니 먹는 것, 입는 것, 사는 것, 사람행사 하는 것 모두가 마음에 신기한 영험으로서 처리되는데 마음의 진원지가 어디 있다는 것만 안다면 외부의 장애물에 구애됨이 없이 많은 것에 소통되는 마음현상 세계를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화두를 알려고 하다가도 알지 못하면 깨닫지 못하는 것이요, 또 바로 깨닫지 않은 사람은 이 화두를 바로 하지 못한 사람입니다. 그런 까닭에 간화선은 주제로 애써 탐구할 때는 깊은 잠을 이겨가며 혼침의 관문을 통과하고 잡념이 집대성된 번민(煩悶)과 산란의 습관에서 벗어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육신이 아닌, 참된 생각으로 찬 마음 세계에서 물질이 아닌 바로 마음 자리가 천하만물과 더불어 둘이 아닌 하나의 도리로 활용되는 것을 선승들 구경이 목적지라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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