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식(八識)의 구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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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보림사 댓글 0건 조회 1,289회 작성일 21-03-15 15:24본문
8식(八識)의 구조
이 세상에 살고 있는 우리들은 인간 인식의 궁극적인 실체인 아뢰야식의 오염 정도의 여부가 중생과 성인(聖人)으로 구별되는 결정적인 기준이 되고 있다. 그렇다면 이 아뢰야식은 그 성질과 구조에 있어서 어떠한 양상을 띠고 있는가. 이를 설명할 때에는 대개 다른 인식 주체들과의 상관관계 속에서 설명하고 있는 것이 보통이다. 즉 우리 인간은 그 마음의 주체가 하나만 있는 것이 아니라 심층적으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에 이들과의 상호관계를 아울러서 설명해야만 그 해답을 찾을 수 있다는 말이다. 이것이 대승불교에서 말하는 8식설(八識說)이다.
이를테면 우리의 몸은 다섯 가지의 감각기관과 정신 등의 복합체로 구성되어 있는데, 여기에서 다섯 가지의 감각기관에 해당되는 것을 불교에서는 안(眼)ㆍ이(耳)ㆍ비(鼻)ㆍ설(舌)ㆍ신(身)이라고 하며, 이들이 중심이 되어 인식활동을 할 때에는 특별히 이를 안근(眼根)ㆍ이근(耳根) 내지는 신근(身根) 등으로 명칭한다. 더 나아가서 이들 인식기관들의 대상[境界]은 각각 물질[色]ㆍ소리[聲]ㆍ냄새[香]ㆍ맛[味]ㆍ감촉[觸] 등으로서 오직 이것들만을 상대하여 인식활동을 하는데, 만약에 눈을 통하여 물질을 분별했을 때에는 이를 눈으로 인식했다고 하여 안식(眼識)이라고 하며, 내지는 몸의 감촉을 통하여 알았을 때는 이를 신식(身識) 등으로 표현하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의 몸은 기본적으로 다섯 가지의 감각기관, 즉 5근(五根)과 이들 인식기관이 분별하여 아는 5식(五識)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외에 정신 부분에 해당되는 분야가 바로 의식(意識)을 말하는 것으로서 이는 의근(意根)에 의지하여 인식작용을 일으키므로 이렇게 부르는 것이다. 좀더 자세하게 설명하면 이 의식은 우리의 신체 외에 존재하는 정신적인 분야로서, 눈 등의 감각기관으로는 볼 수가 없고 만져 볼 수도 없지만 그렇다고 아주 없는 것이 아니고, 앞의 다섯 가지 감각기관의 저 깊은 곳에서 항상 동반하여 일어나거나 아니면 독단적으로 활동하는 정신적인 소산을 말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 의식의 대상을 불교에서는 특별히 ‘법경’(法境)이라고 하는데, 여기에서 법이란 일체제법(一切諸法)과 같은 존재로서 유형적인 모든 사물은 물론이고, 무형적인 관념까지도 포함해서 말하는 그런 존재를 말한다.
따라서 우리의 몸은 다섯 가지의 근과 이들의 저류에 항상 흐르고 있는 의근 등 여섯 가지의 감각기관[六根]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여기에 그 대상들인 여섯 가지의 경계[六境]를 합치면 십이처(十二處)가 되는데, 이는 전체적으로 이 세상의 모든 것을 의미하는 ‘일체’(一切)라는 술어로 사용되고 있다. 다시 말하자면 ‘12처설’이란 이 세상의 모든 것은 다른 사람 아닌 자기 자신이 직접 눈으로 볼 수 있어야 하고, 또한 귀로 들어서 분별할 수 있어야 하며, 내지는 몸의 촉감들을 통하여 감지할 수 있어야 하는 것 외에 어떠한 기억력이나 상상력을 통해서라도 인식할 수 있는 것이 존재하는 것이지, 이들 모두를 통해서 도저히 감득할 수 없다면 설령 그것이 다른 사람에게는 존재한다고 해도 인식 주체인 자기 자신에게는 존재하지 않는 것과 같다는 인식론적인 해석에서 이렇게 정의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의식이 일어나는 데는 크게 두 가지의 경우가 있는데, 먼저 한 가지는 전오식(前五識)과 함께 일어나서 같은 대상을 인식하거나 아니면 5식과 함께 일어났지만 의식이 한눈을 팔아서 올바른 인식이 제대로 안 되는 경우 등 아무튼 전오식과 동시에 일어나는 경우가 그것이고, 또 한 가지는 꿈을 꾸거나 망상, 공상 및 선정(禪定)에 들 때와 같이 의식이 독단적으로 일어나는 경우 등을 말한다.
그러므로 소승불교 시대에서는 이와 같이 다방면에 걸쳐서 그 인식활동의 범위가 넓은 6식설만을 가지고도 충분히 우리들의 인식활동의 원리를 대변한다고 보았던 것이다. 그렇지만 그 본존성(保存性)과 때에 따른 단속(斷續)의 문제 등으로 말미암아 대승불교 시대에 들어서는 인간의 궁극적인 실체로서 어느 때, 어느 곳을 막론하고 항상 변화하지 않고 상존할 수 있는 그 어떤 것을 상정하게 되었으니, 그것이 다름 아닌 제8 아뢰야식(阿賴耶識)이었던 것이다. 따라서 이 아뢰야식은 우리들이 잠을 잘 때나 심지어 죽어서 혼백(魂魄)이 떠돌아다닐 적에도, 내지는 어머니의 뱃속에 들어 있을 때에도 그 활동을 계속한다는 것으로서 6도(六途) 윤회의 주체로 등장한 것이다.
그러면 이와 같은 제8 아뢰야식을 일으킨 근본 원인은 무엇인가. 그것은 우리가 일부러 어떤 의도적인 행위, 행동을 하거나 아니면 언제부터인지는 모르지만 자기도 알지 못하는 사이에 아전인수 격으로 끊임없이 아치(我癡)ㆍ아견(我見)ㆍ아만(我慢) 및 아애(我愛) 등 4종의 근본번뇌와 항상 같이하면서 업(業)을 일으킬 때에, 이들에 의한 인상(印象)이나 여운(餘韻) 등을 그대로 흡수하여 저장하는 장소로서 아뢰야식이 활용되는데, 이렇게 근본적인 원인을 제공하는 정신은 제6 의식(意識) 보다는 깊고 제8 아뢰야식 보다는 얕은 제7 말나식(末那識, manas-vijñāna)이라는 의식이 상정됨으로 해서 가능하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제7 말나식을 일컬어서 자아의식이라고도 하며, 이 식(識)에 의하여 업(業)을 지어서 우리 중생들이 결과적으로 세세생생 윤회케 되는 것이다.
한편 제8 아뢰야식은 이렇게 모든 업의 산물들을 스스로 저장하는 능장(能藏)으로서의 의미도 갖고 있으며, 한편으로는 모든 세력들을 소장(所藏)할 장소로서의 처소로도 제공되는 것이다. 더 나아가서 이 아뢰야식은 앞에서와 같이 항상 제7 말나식의 집착력과 아집 등에 의하여 유린당하는 입장에 서 있으므로 이럴 경우 제8 아뢰야식은 집장(執藏)의 뜻이 강하다고 한다. 왜냐하면 아뢰야식이라는 본래의 의미는 유루법(有漏法)이 현행하는 사이, 곧 아집(我執) 등이 활동하는 위치까지에서만 존재하는 것이지, 아집 등이 없는 성인위(聖人位)에 오르면 이 식(識)의 이름은 자연히 없어지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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