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을 알면 마음이 보인다 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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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보림사 댓글 0건 조회 722회 작성일 21-03-19 11:38본문
〈몸을 알면 마음이 보인다 下〉
-마음을 보는 것은 실제 상황이다
자기 마음을 보는 것은 실제 상황입니다. 관념의 세상이 아니라 실제 내가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지를 보는 겁니다. 이걸 봐야 진정한 지혜가 생깁니다. 제가 어제 어느 스님한테 들었는데, 옛날에 이런 마음을 보는 걸 견성이라 썼다고 주장하는 학자도 있답니다. 깨달음을 이야기하는 게 아니고 마음상태를 볼 줄 아는 것을 견성이라고 했다는데 상당히 일리 있다고 생각합니다.
-수행자로서의 전환점은 자기 마음을 알아차리는 바로 그 지점이다
깨달음은 번뇌가 소멸되는 것을 이야기합니다. 완전히 번뇌가 소멸되어 더 이상 번뇌라고 하는 씨가 말라버리는 거죠. 부처님께서는 나무를 통해 이를 표현하셨습니다. 나무가 있으면 그 나무를 자릅니다. 그 다음에 잔뿌리까지 하나도 남김없이 다 뽑아 갈기갈기 쪼갭니다. 쪼갠 후에는 바짝 말려서 완전히 태웁니다. 그리고 태워 재가 된 다음 날려버립니다. 이렇게 하면 그 나무가 다시는 자랄 수 없겠지요. 번뇌가 이렇게 된 상태가 아라한의 상태라고 표현합니다. 번뇌, 그 조건 자체가 완전히 사라져버린 거예요. 어떤 자극에도 번뇌가 일어날 수 없다는 겁니다. 이렇게 되는 게 깨달음이지만 우리가 수행자로서 전환되는 지점은 바로 자기 마음을 알아차릴 수 있는 그 지점입니다. 그게 굉장히 큰 의미를 가집니다. 이것만 돼도 정말 많은 향상이 됩니다.
-물질을 알아야 마음을 안다
그런데 보통은 자꾸 마음을 경계에 뺏깁니다. 마음을 계속 마음의 문제로 환원해서 알아차리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이 자기 마음을 보는 방법을 무엇부터 시작하는 게 좋은지에 대해『청정도론』에서는 물질을 제대로 알아야 마음을 알 수 있다고 했습니다. 물질을 잘 모르는 사람이 마음을 보기 시작하면 기반이 없는 상태에서 마음을 보기 때문에 길을 잃어버리기 쉽습니다.
-물질과 형상이 부딪쳐 마음이 일어난다
아까 말했듯이 감각접촉이 일어나는 곳에서 마음이 일어납니다. 물질을 의지해 마음이 일어난다는 거지요. 눈이라는 물질과 형상이라는 물질을 의지해서 그것이 만나 마음이 발생한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눈이라는 걸 알고 형상을 알면 그 부딪침에서 일어나는 안식(眼識)이라고 하는 그 마음을 보는 마음도 알기가 쉽습니다. 거꾸로 마음을 보면 이 마음이 무엇에 의지하는지 그 물질을 찾아낼 수도 있습니다.
-몸을 아는 마음을 알면 마음을 알아차릴 수 있다
초보자들의 경우는 이 몸이라는 물질을 알아차리는 걸 통해서, 그 몸을 아는 그 마음이 오염되었는지 오염되지 않았는지를 또 알아차리게 되면 그게 마음을 알아차리는 것이 될 수 있습니다. 한 걸음 물러서서 이 마음이 대상을 만날 때 어떤 마음이 작용하는지를 같이 알 수 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일단은 감각대상을 알아차리는 것이 기본이 됩니다.
첫째, 다섯 감각대상을 알아차리는 것이 기본이 되면 그걸 아는 마음의 번뇌가 없으면 알아차림이 깨끗하게 진행이 됩니다. 볼 땐 보는 것만 있고, 들을 땐 듣는 것만 있습니다. 그러면 ‘아, 여기에는 번뇌가 없다’는 것을 또 알아차릴 수 있습니다. ‘나한테 탐욕이 없구나.’, ‘성냄이 없구나.’ 그렇게 알 수도 있습니다. 만약 듣는 과정에서 짜증이 났다면 그 짜증을 알아차리는 건 화를 알아차림하는 것입니다.이렇게 해서 대상을 통해 일어나는 그 마음의 변화를 알아차리는 것이 마음에 접근하는 제일 쉬운 방법입니다.
-몸을 통해 마음을 알아차린다
『대념처경』을 보면 부처님께서 사념처(四念處) 수행을 이야기할 때 제일 먼저 나오는 게 신념처, 몸에 대한 알아차림입니다. 제따와나 법요집 249페이지『대념처경』을 봅시다. 신념처가 나옵니다. 우리가 알아차림을 이야기할 때 신념처는 물질에 해당합니다. 수(受), 심(心), 법(法)이라고 하는 것은 주로 정신에 해당하는데, 법에는 물질이 일부 포함되기도 합니다.
몸이라는 것은 분명하게 관찰하고 경험할 수 있는 것입니다. 정신적인 것은 긴가민가할 수도 있지만, 손이 움직이고, 걸어가고, 밥 먹고, 이런 몸에 관한 것은 분명하게 드러나는 현상입니다. 이걸 통해서 현상을 아는 마음, 알아차리는 마음 쪽으로 가는 것이 쉽습니다. 처음부터 마음만 보려고 할 때는 뭐가 뭔지 모르고 그냥 생각을 알아차리고 이런 걸 마음을 알아차린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마구 생각이 움직이는 걸 알아차리는 것은 실질적으로 위빠사나라고 하기에는 상당히 부족합니다.
-호흡을 통해 생각 가라앉히기
그래서 처음에 들숨날숨을 통한 호흡수행, 사마타 수행은 마음을 가라앉히고 생각을 가라앉히는 데 굉장히 효과적인 수행법입니다. 부처님께서도 생각을 가라앉히는데 가장 좋은 방법이 바로 이 호흡법이라고 했습니다. 호흡을 통해서 일단 생각이 좀 걷혀야 알아차림이 잘 됩니다.
여러분에게 평소에 제가 사마타와 위빠사나 수행 두 가지를 같이 하라고 이야기하는데, 좀 시간이 있으면 호흡에 대한 알아차림을 해서 마음이 좀 가라앉으면 그 때 위빠사나로 전환하는 것이 훨씬 좋습니다.
이렇게 호흡이 제일 먼저 나오고, 그 다음에 나오는 것이 네 가지 자세입니다. 이것이 위빠사나의 기본인데, 여기서 네 가지 자세란 행주좌와(行住坐臥)를 말합니다. 행(行)이라는 것은 걸어가는 것, 주(住)는 서 있는 것, 좌(坐)는 앉아있는 것, 와(臥)는 누워있는 것입니다. 걸어갈 때는 걸어가는 것을 알고, 앉아있을 때는 앉아있는 것을 알면 됩니다.
-사대(四大) 중 땅(地)의 요소
다음으로『대념처경』제따와나 법요집 254페이지에서 사대(四大), 네 가지 근본물질에 대해 나옵니다. 몸에는 땅의 요소도 있고, 물의 요소도 있고, 불의 요소도 있고, 바람의 요소도 있습니다. 제가 색, 성, 향, 미, 촉이라는 감각대상을 말씀드렸는데, 이 감촉이라고 하는 것의 본질은 바로 사대와 관계가 있습니다. 사대의 첫 번째는 땅(地)의 요소인데, 예를 들어 손으로 만질 때 느끼는 딱딱함, 매끄러움, 단단함과 말랑말랑함, 거침, 무거움, 가벼움 등으로 드러나는 것을 땅의 요소, 지대(地大라)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몸을 만지면서 말랑말랑하다고 말하는 건 땅의 요소가 드러나는 겁니다. 머리와 이빨의 단단함, 옷을 만질 때의 거칠거칠함 역시 땅의 요소입니다. 땅의 요소라는 건 일반적으로 이야기하는 그 땅을 이야기하는 게 아닙니다. 땅의 요소라는 것은, 물리학적으로 말하면, 그 물질이 가지고 있는 무거움, 가벼움 등 질량하고 관계가 있는데 이걸 말로 딱 표현하기가 쉽지는 않습니다. 대략적으로 지대라는 것을 표현하면 그렇다는 것이고, 단단함이 대표적인 성질입니다.
-사대(四大) 중 불(火)의 요소, 바람(風)의 요소, 그리고 물(水)의 요소
그 다음 불이라는 것은 온도를 얘기합니다. 물질을 만지면 차갑다거나 뜨겁다고 압니다. 우리의 몸에도 따뜻함이 있고 차가움이 있습니다. 이런 것을 불의 요소, 화대(火大)라고 합니다.
그리고 제가 지금 손을 이렇게 움직이고 있지요. 이건 운동성이죠. 물질은 운동할 수 있는 힘, 운동의 가능성을 항상 가지고 있습니다. 이렇게 움직이게 하는 건 풍대(風大)가 있기 때문입니다. 또, 이렇게 움직이다가 멈춰 가만히 지탱하는 것 역시 풍대의 작용입니다.
그리고 또 움직이지 않더라도 이 물질이 이러저러한 모양을 유지할 수 있도록 묶어주는, 물리학으로 이야기하면 인력이 있습니다. 이 작용을 우리는 지(地,) 수(水), 화(火,) 풍(風)에서 수대라고 이야기합니다. 이건 물질의 형태를 유지시켜주는 역할을 합니다. 그러니까 물 같은 것도 흩어지지 않고 흘러갈 수 있는 건 그 형태를 유지해주는 응집의 힘이 있기 때문입니다.
-모든 물질은 사대(四大)로 이루어져 있다
어떤 물질이든, 지, 수, 화, 풍, 이 네 가지 요소를 다 갖추고 있습니다. 우리 몸도 마찬가지입니다. 머리카락이든 우리 몸 전체든, 아니면 아주 작은 원자 단위로 보든, 어떤 형태든지 물질이라는 것에는 단단함이나 가벼움, 무거움 등 지대가 있고, 뜨겁거나 차가운 온도가 있고, 그 다음 운동성이나 그 물질을 묶어 형태를 유지시켜주는 힘이 있습니다. 지, 수, 화, 풍, 이 네 가지를 사대라고 하는데 이것은 바로 우리 몸의 감각을 통해서 느낄 수 있는 겁니다. 수대는 의식과 지혜로 아는 거지만, 뜨겁고 차가운 것 등은 몸의 감각을 통해서 분명히 느끼고 경험할 수 있습니다.
이 기본적인 것이 바로 색, 성, 향, 미, 촉이라고 하는 바로 그것입니다. 촉이라고 하는 것은 지대나 화대나 풍대가 드러나는 것을 촉이라고 하는 겁니다. 손으로 단단하거나 딱딱한 걸 느끼는 것은 지대를 느끼는 것입니다. ‘아, 이건 차네.’ 라고 느끼는 건 화대, 그 다음 눌러도 안 내려가고 딱 받쳐주고 있는 것이 바로 풍대입니다. 움직이는 것도 풍대의 역할입니다. 멈춰있는 것, 내가 이렇게 손을 움직이다가 이렇게 딱 멈춰있는 이것도 일단 풍대의 역할입니다. 정지하고 있는 것도 일단 운동과 관계가 있습니다.
-네 가지 근본물질 알아차리기
걸어가는 건 주로 풍대가 작용하는 것입니다. 맨발로 바닥에 닿을 때는 화대도 작용할 수 있습니다. 실제로 우리가 걷는 동작 속에서 걷고 있다는 것은 알고 있지만 나중에는 그냥 그 움직임 자체를 알거나 닿는 느낌, 닿는 그 감각 자체를 알게 됩니다.
이제 ‘걷고 있다’는 개념이 아니라 실상을 봐가는 과정인 것입니다. 걷고 있으면 걷고 있다고 알고, 서 있을 때는 서 있다는 것을 압니다. 서 있을 때 주로 바닥에 닿는 감각, 그리고 가만히 지탱하고 있는 풍대를 느끼거나 상황에 따라 달라지겠지요. 그리고 앉아있을 때도 엉덩이가 바닥에 닿는 것을 느낄 수도 다리에 오는 통증, 자극, 이런 것도 지대에 해당합니다. 그런데 앉은 자세에서 다리에 열이 난다면 그것은 화대가 되겠지요. 그리고 몸의 움직임을 느낀다면 이건 풍대라고 합니다.
이렇게 실제로 일어나는 현상들을 보다보면 색, 성, 향, 미, 촉이라고 하는 것이 결국은 지대나 화대 풍대로 드러납니다. 우리가 애인하고 손을 잡고 너무 좋다고 얘기하지만 실제로 그 닿는 그 감각은 부드러움을 느끼거나 따뜻함을 느끼거나 이런 사대의 요소를 느끼는 겁니다. 그걸 우리가 좋다거나 싫다고 반응하는 것입니다. 실제 상황은 그런 감각접촉의 지대, 화대, 풍대 중 하나가 드러나는 것입니다. 그리고 몸이 어떤 자세를 취하고 있든, 즉, 걷다가 앉을 때나, 앉다가 누울 수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아난존자는 이제 앉았다가 누우려고 하는 그 때, 누운 것도 아니고 앉은 것도 아닌 그 상태에서 아라한이 되었다고도 합니다. 몸이 다른 어떤 자세를 취하고 있든 그 자세대로 꿰뚫어 알아서 아라한이 된 존재로 아난존자를 들고 있습니다.
-물질에 대한 알아차림에서 마음에 대한 알아차림으로
나아갈 때도, 물러설 때도, 앞으로 나아갈 때 자기가 나아간다는 걸 분명히 알고 실상 그대로를 보는 겁니다. 나아갈 때도 거기서 일어나는 풍대를 보는 거지요. 그리고 이렇게 하다보면 그 형상을 통해 만약에 마음에서 좋다는 탐욕이 일어나, 그때 그걸 알아차리면 마음에 대한 알아차림으로 바뀌는 겁니다. 그리고 그걸 보면서 좋은 느낌이 일어나는 것을 알아차리면 느낌에 대한 알아차림이 되는 겁니다. 거기에 대한 또 탐욕 자체를 알아차리면 법념처, 법에 대한 알아차림입니다. 이렇게 바로 물질에 대한 알아차림을 통해서 그 알아차림을 아는 그 마음이 어떤 식으로 작용하는지를 보게 되면 이게 마음에 대한 알아차림으로 바뀌는 겁니다.
-생활 속에서 늘 몸을 알아차릴 수 있다
다시 간단히 설명하면, 먹을 때, 맛볼 때, 분명히 알아차릴 수 있습니다. 먹을 때도 우리가 숟가락을 들고 잡는 것부터 시작해서 들어올리는 과정, 손이 이렇게 잡고 잡을 때 감각을 알고 움직임을 알고, 닿는 감각, 약간 성냄하고 관계있는 맛이 없다고 아는 것, 그런 마음을 또 알아차립니다. 물질을 알 수 있지만 그 물질에 반응하는 내 마음도 알 수 있습니다. 이빨이 아래위로 움직이는 걸 알아차릴 수 있고, 목에서 넘어가는 것도 알 수가 있습니다. 알아차릴 수 있는 건 무궁무진합니다. 여러분들이 그 때 그 때 그 상황에 맞게 알아차리면 되는 겁니다.
대소변을 볼 때, 걸을 때, 말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대화할 때, 내가 말하면서도 누가 말하는 것을 듣는 것, 다른 번뇌 없이 그 소리자체를 귀 기울여 듣는 것도 굉장히 중요합니다. 들으면서 계속 내 마음이 움직일 수 있습니다. ‘저 사람이 잘난체하는군.’, ‘왜 저렇게 자꾸 떠들지?’ 등 이럴 때 자기 마음에 일어나는 자만이나 싫어하는 마음 등을 알아차려야 됩니다. 대화를 나누면서, 자신이 말을 할 때 어떤 의도로 말하는지 알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서 우리가 열반당에서 수행을 할 때도 아무 생각 없이 쿵쿵 걸으면 다른 사람에게 방해가 되겠지요. 그런데 걸어가는 발걸음에 대한 알아차림을 잘 하면 걸어도 천천히 걷게 되고 소리 안 내고 부드럽게 걸을 수 있습니다. 그거 자체가 내가 행동을 함부로 하지 않고 그렇게 되면 마음이 안정되기 때문에 또 마음도 고요해집니다. 문을 닫을 때도 그냥 쾅 닫는 게 아니라 고리를 잡고 살짝 닫으면 다른 사람 수행에 방해가 안 되고 내가 그 잡는 그 행위를 알아차림을 할 수가 있습니다. 이런 게 다 여러분 삶에서 일어나는 수행의 과정입니다. 그리고 설거지를 할 때도 다른 생각을 하는 게 아니라 그릇에 닿는 감각이나 물의 뜨거움이나 차가움을 느낄 겁니다. 마음 상태를 그 일에 집중하다 보면 마음이 미세하게 움직이는 게 포착이 됩니다. 이런 식으로 알아차림을 이어나가면 몸을 통해서 마음을 알 수 있는 겁니다.
-몸을 통해 마음을 보는 것으로 나아가기
그러나 몸을 아는 것으로 끝나서는 절대 안 됩니다. 몸을 통해서 일어나는 자기 마음을 보는 쪽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만약 그렇게 잘 되지 않는다면 지금 자신의 마음 상태가 어떤지 주기적으로 관찰을 해 보는 것도 좋습니다. 번뇌가 있는지 없는지, 번뇌로 작용하는 게 아닌지 스스로 돌아보는 겁니다. 지혜가 작용하면 아무 문제가 없지만 어리석음이나 성냄, 탐욕이 작용하면 문제를 일으킵니다.
만약 그렇다면 알아차려서 탐욕이나 성냄, 어리석음에 휩쓸리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처음 화가 일어날 때는 화가 나는 거라고 아는데, 화가 난 다음에는 화는 숨고 생각이 진행됩니다. 이때 화는 잘 안 보이기 때문에 많이 속는데, 그 생각이란 것의 실제 밑뿌리에는 화가 계속 작용하는 경우가 아주 많습니다. 여기에 속으면 안 됩니다. 화가 드러나지 않으니까 자기는 화를 안 내고 있다고 생각하는 거지만 그걸 제대로 볼 줄 알아야 합니다. 실제 자기 마음 상태는 화가 계속 작용하고 있는 상태입니다.
그래서 이런 것을 잘 보게 되면, 마음이 점점 확장되어서 어떤 것도 알아차릴 수 있게 됩니다. 자기 마음이 번뇌로 오염되었는지 아니면 지혜나 자비심이 잘 작용하고 있는지 스스로 알게 됩니다.
-바른 노력으로 이어가기
이렇게 마음을 보는 것이 전제가 되어야 그 다음 바른 노력이 가능해집니다. ‘아, 이건 불선한 마음이니까 버려야 돼.’ ‘이런 선한 마음은 계발해야겠다.’ 이렇게 노력을 해야 성장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보통은 평생 자기 마음을 한 번 들여다보지도 않고 계속 잘난체하거나 자기가 어떻게 사는지 모르고 살아갑니다. 이를 가치 있는 삶이라고 하기는 어렵습니다. 이건 재수로 사는 겁니다. 진짜 재수 좋게 선한 행동을 했으면 다행이고, 그렇지 않으면 자기 세계에 빠져 있기 때문에 이런 사람들은 남들의 비난도 잘 모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처음 위빠사나 수행을 할 때, 지금 이 순간 자기 몸에서 일어나는 걸 바탕으로 해서 거기서 대상을 아는 그 마음이 어떻게 작용하는지 접근하는 게 좋습니다. 그것이 마음으로 쉽게 접근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뱀을 잡으려면 뱀 구멍이 어딘 줄 알아야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생각이 일어나는 것이 눈과 귀의 감각접촉을 통해서 일어난다는 것을 알아야 눈이나 형상, 귀나 소리, 마음을 정확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마음을 보는 것이 출발이다
불교를 만난 이번 생에서, 첫째는 마음을 볼 줄 알아야 됩니다. 마음을 못 본다면, 아까 말했듯이, 불교를 안다고 말하기 어렵습니다. 마음을 보기 시작하면 마음이 왜 일어나는지 그 원인을 알게 됩니다. 그런 지혜가 생기는 것이지요.
저는 사마타와 위빠사나를 같이 하라고 말하는데, 기본적으로 자기 마음을 볼 줄 알면 사마타에 좀 몰두해도 크게 문제가 안 됩니다. 순서로 보면 자기 마음을 보는 게 제일 먼저입니다. 마음을 볼 줄 아는 힘이 있어야 합니다. 그러고 나서 자기 마음을 볼 때 사마타의 힘이 부족하다 싶으면, 삼매를 닦아서 더 섬세하고 마음을 볼 수 있도록 합니다. 집중력, 삼매의 힘이 좋아야 마음을 세밀하게 볼 수 있거든요. 그러면 연기 같은 심오한 법도 볼 수 있게 되고, 연기를 봐야 무상(無常), 고(苦), 무아(無我)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 세상이 무상하다는 것을 아는 것은 굉장히 강력한 위빠사나의 지혜입니다. 마음을 보는 것이 출발점입니다. 이것을 보고 나서야 이런 것들이 다 된다는 것을 아시고 이번 생에 적어도 마음을 보는 것을 잘 익혀서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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