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문제를 풀어내는 연기공식 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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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보림사 댓글 0건 조회 726회 작성일 21-03-19 16:20본문
〈삶의 문제를 풀어내는 연기공식 下〉
-부처님께서 설하신 연기 공식
두 번째로 오늘 이야기하려는 주제는 부처님께서 제시한 공식에 대한 겁니다. 수학에서 이차방정식에는 근의 공식이 있습니다. 삼차방정식은 좀 더 어렵지만 특히 이차방정식은 공식만 알면 모든 문제를 다 풀 수 있거든요. 공식을 알면 모든 문제를 다 풀 수 있는 것처럼 여러분이 인생의 문제들을 푸는 데 있어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공식은 정말 대단한 공식이라고 생각합니다. 수학에서도 많은 분야에 적용되는 이론을 아주 위대한 정의라고 말하기도 하고, 뷰티풀이라는 표현도 많이 써요. 정말 아름다운 공식이라고도 말하는데,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자신의 문제를 푸는 위대한 공식은 연기이고 십이연기에서 말한 구조입니다. 이걸 여러분이 다 이해하는 것은 쉽지 않아요. 그래서 좀 더 많은 공부가 필요하지만 그 중에 핵심적으로 제가 말씀드린 부분만 이해해도 굉장히 큰 부분에서 문제가 해결될 수 있습니다.
-정신적 괴로움은 항상 성냄과 함께 한다
첫째, 괴로움이라는 건 크게 두 가지 의미로 이야기할 수 있어요. 육체적인 괴로움과 정신적인 괴로움입니다. 몸을 가지고 있으면 적어도 육체적인 괴로움은 완전히 벗어날 수 없어요. 부처님조차도 누가 때릴 때 아픈 건 벗어날 수가 없잖아요. 병에 걸리고 바이러스에 걸려서 아픈 건 벗어날 수 없지요. 그런데 정신적 괴로움은 수행을 통해서 완전히 벗어날 수 있습니다. 이 정신적 괴로움을 성냄이라고 합니다. 정신적 괴로움은 항상 성냄이 함께 한다는 거예요. 느낌이 일어난다는 건 성냄이 작용한다는 거고, 성냄이 있으면 반드시 정신적으로 괴로운 느낌이 작용합니다. 그러나 이건 우리가 버릴 수 있어요.
빠알리어로 성냄을 도사dosa라고 해요. 도사라는 원어에는 반대되는 걸 태워버린다는 뜻이 있어요. 여러분에게 화라는 것이 일어나면 십년 이십년 쌓아온 공덕이 한 순간에 무너질 수 있습니다. 친구끼리 잘 놀다가 화 한 번 나서 때리고 평생 원수 되는 경우도 있잖아요. 심지어 살인을 하기도 하잖아요. 그래서 화라는 것이 크게 발생하면 평생 쌓은 공덕, 오랜 세월 쌓은 공덕을 한 순간에 태워버릴 수도 있어요. 도사라고 하는 것은 태워버린다는 뜻이 있어서 중국에서 화火로 번역한 거라는 생각도 들어요.
또한 도사에는 대상을 싫어한다는 뜻도 있어요. 싫어하는 형태는 다양하게 있겠죠. 분노하고 화를 내는 건 당연히 싫어하는 거지만 그 외에도 슬퍼하는 것도 그 상황에 대해 싫어하는 것이고, 따분한 것도 싫어하는 것의 한 종류일 수 있습니다. 짜증내는 것도 일종의 도사에 들어가고, 우울한 것도 성냄의 한 영역입니다. 이렇게 도사라는 건 굉장히 범위가 넓습니다. 현재의 상황에 만족스럽지 않고 공포를 느끼고 두려움을 느끼는 게 다 성냄에 들어갑니다. 그래서 성냄을 우리가 보통 괴로움이라고 느끼는 거죠. 우울해진다는 건 성냄이 일어나는 것이고 도사가 작용한다고 볼 수 있는 거죠. 밤에 길을 갈 때 두렵고 공포스러운 것도 잘 모르는 상황에 대해 싫어하는 마음이지요. 대중 앞에 설 때 두려움을 느끼는 것도 다 성냄의 한 형태입니다.
-화가 일어나는 것을 지켜보는 것이 첫째 공식이다
그런데 이런 성냄, 화가 일어났을 때 그 화에 압도되지 말고 지켜봐야 합니다. 지켜본다는 것은, 아, 지금 내 마음에서 화가 일어나고 있구나, 이렇게 봐야 한다는 거예요. 화라는 현상이 발생하는 걸 일단 보는 것이 첫째 공식이라면 공식이에요. 화를 볼 때 타인이나 다른 대상의 문제로 돌리지 말고 내 마음에서 도사라고 하는 심리현상이 발생한다, 그냥 도사가 일어난다, 이렇게 봐야 한다는 거예요. 이걸 수상행식受想行識으로 보면 행온行蘊입니다.
-바라는 것이 없으면 괴로움이 없다
화는 그 이면을 보면 반드시 자기가 원하는 것이 있습니다. 화가 일어나는 걸 보면 그 다음에 내가 뭘 원하는지를 봐야 해요. 화가 일어날 때 분명히 자기가 원하는 부분이 있습니다. 탐욕이 있어요. 화라는 것은 반드시 탐욕을 바탕으로 합니다. 만약 여러분이 원하는 게 없다면 성냄이 있겠습니까. 없겠지요. 부처님이 돌아가셨을 때 부처님 당시 아나함 이상의 아라한들은 울지 않았습니다. 부처님을 미워해서 안 울었을까요. 부처님을 귀하게 생각하지 않아서 안 울었겠습니까. 태어난 존재는 죽을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고, 그것을 인정하고, 진리를 알기 때문에 지켜보는 것이지, 싫어하거나 부처님을 존경하지 않기 때문이 아니거든요.
바라는 게 없는 사람은 괴로운 게 없어요. ‘맛지마니까야’에 ‘애생경’이라는 경이 있습니다. 거기에서 부처님께서 사랑하는 사람이 있기 때문에 괴로움이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일반적으로 생각할 때 사랑하는 사람이 있으면 괴로운 게 아니라 행복하다고 생각하지요. 그런데 사랑하는 사람이 있기 때문에 괴롭다고 말씀하시니까 사람들이 술렁술렁 했어요. 말이 안 된다, 이건 부처님이 잘못 말씀하신 거다, 이렇게들 말이지요. 그때 빠세나디 왕도 이 말씀을 의심했는데, 아주 지혜로운 말리까 왕비는 부처님이 그렇게 말씀하실 땐 분명 이유가 있을 것이니 가서 한 번 여쭤보라고 했죠. 그래서 왕이 가서 여쭸더니 부처님께서 이렇게 물으셨습니다. “왕이시여, 당신에게 사랑하는 공주가 있소?” 왕이 있다고 하자 “만약 그 공주가 아파서 누워있으면 왕은 어떻겠소.”라고 하셨지요. 왕은 차라리 자신이 아픈 게 낫지 공주가 아픈 걸 어떻게 보겠느냐고 했습니다. “보아라, 공주를 사랑하니까 그런 괴로움이 생기는 것 아니겠느냐.”라고 말씀하셨지요.
-탐욕이 없으면 성냄이 없다
가까운 사람이 죽었을 때 울고불고 하는 이유가 뭐겠습니까. 애착이 있기 때문이죠. 죽음을 당연한 현상으로 보면 슬퍼할 이유가 없죠. 불교에서 볼 때 성냄이라고 하는 것은 반드시 감각적 욕망과 쌍을 이루고 있습니다. 아나함이 되면 성냄이 사라지는데, 이런 사람들은 절대 울거나 하지 않습니다. 탐욕이 없는 사람에게는 성냄이 없어요.
성냄이 일어났다는 것은 집착하고 있는 게 있다는 뜻입니다. 여러분이 불만이 있다는 거죠. 자신이 뭔가를 가르치고 있는데 배우는 사람이 말하는 걸 안 듣고 딴 소리를 한다면 어떻겠어요. 성질이 나겠죠. 왜 성질이 나겠어요. 내가 가르치는 사람이고 너는 배우는 사람인데, 내가 하는 말을 알아들어야지 왜 딴소리 하느냐, 이런 개념과 고정관념, 집착이 있기 때문이에요. 내가 말한 것이 옳고 그걸 들어야 되는데 왜 나한테 반발하느냐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만약 집착이 없으면 반발을 하더라도 화를 내지 않고 조목조목 상황을 이야기해 줄 수 있을 겁니다. 그러나 자신이 바라는 게 있고 기대하는 게 있기 때문에 화를 내게 되지요.
여러분이 보통 데이트하러 갈 때 기대를 많이 합니다. 그런데 막상 가서 상황이 기대와 전혀 다르게 전개되면 엄청 화가 나죠. 이렇게 다 자신이 기대하는 바가 있으면 반드시 불만족으로 작용을 합니다. 만약 마음에서 불만족이 일어나고 괴로움이 일어나고 화가 일어날 때는 첫 번째, 자기 자신이 뭘 원하고, 뭘 집착하는지를 보면 본질을 보기가 쉽습니다.
저 사람 때문에 화가 난다고 보면 문제에 접근하기가 힘들어요. 물론 타인에게 원인이 있을 수도 있지만 더 근원적인 건 자신의 마음에 있는 탐욕입니다. 마음에 탐욕이 없다면 남이 아무리 무슨 짓을 해도 화가 안 나겠지요. 자신이 바라는 게 있기 때문에 화가 발생하는 거예요. 아라한을 화나게 할 수 있는 방법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설사 목숨을 잃고 아무리 부당한 일을 당해도 화가 날 수가 없어요. 아라한에겐 화라는 것이 소멸되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원하고 집착하는 게 있기 때문에 화가 난다
화라는 건 감각적 욕망하고 쌍이에요. 탐욕에는 감각적 욕망과 존재에 대한 욕망이 있는데, 아나함이 되면 감각적 욕망은 사라지지만 존재에 대한 욕망은 사라지지 않습니다. 그런데 감각적 욕망만 사라져도 화는 영원히 사라집니다. 화라는 것이 있을 때는 자신이 뭘 원하는지, 뭘 집착하고 있는지를 보면 문제를 해결할 수 있어요.
원하는 것과 집착하는 것을 보면 인정이 됩니다. 이러저러한 걸 자신이 원해서 화가 났다는 걸 보면 이걸 놓기가 훨씬 쉬워요. 이걸 이해하면 수긍할 수 있고 놓을 수가 있는데, 이해되지 않은 상태에서 억지로 화를 누르려고 하면 별로 효과가 없습니다. 화가 사라진 게 아니라 화를 계속 누르고 있는 것이기 때문에 나중에 더 크게 폭발합니다. 우선 첫 번째 공식으로, 화가 날 때, 화를 아는 것도 타인에게 문제가 있는 게 아니라 자신한테 화가 났다고 알아야 된다는 겁니다. 자기 자신에게 화가 일어났다고 생각해야 돼요. 그리고 두 번째는 화가 날 때는 반드시 원하고 집착하는 게 있다는 것을 보는 거죠.
-감각적 욕망은 짧게 즐겁고 오래 괴롭다
다음 이 세 번째가 약간 어려워요. 집착과 탐욕의 뿌리에는 항상 어리석음이 바탕이 되어 있습니다. 제일 대표적인 예가 감각적 욕망이라는 건데, ‘애생경’에서 사랑하는 사람이 생기는 것이 고苦, 괴로움이라고 했지요. 그리고 이것이 장애요소, 혹은 번뇌라고 설명을 하셨단 말이에요.
그런데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대부분 감각적 욕망을 누리는 것을 행복이라고 생각하죠. 행복이라고 생각하고 붙들고 싶으니까 감각적 욕망을 버리라고 하면 수긍을 안 하죠. 수긍도 안 하고, 인정을 못하는 거예요. 하지 말라고 하니까 안 하긴 하는데, 그래도 좋다고 생각하니까 다른 데 가면 또 그 일을 하는 거죠. 예를 들어 담배 피우는 게 행복인데, 어디에 가면 거기에서 담배피우지 말라고 하니까 안 하다가 그 상황만 바뀌면 다시 또 담배를 피웁니다. 감각적 욕망이라고 하는 것을 행복이라고 생각하는 한은 바뀌지 않습니다.
부처님의 지혜의 눈으로 보면 감각적 욕망이라는 것 자체가 행복이 아니라는 뜻은 아니에요. 제가 어제 행자에서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었는데, 무슨 일이 있어서 한 이틀 동안 울고불고 한 적이 있대요. 눈물이 멈추지 않았는데 인터넷 기사를 검색하다가 눈물이 멈추더래요. 우리가 그동안 괴로움을 해소하는 방식이 항상 감각적 욕망을 통해서였기 때문에 마음이 괴로우면 그 문제를 직시하기보다 감각적 욕망을 즐기면서 일시적으로 해소되는 경험을 하지요. 우리는 지금까지 괴로움을 해소하는 방법으로 감각적 욕망을 즐기는 것 외에 별로 해본 적이 없었던 거예요. 괴롭긴 하지만 문제를 직시하는 것보다 그걸 욕망으로 잠시 돌리니까 마음이 편안해지는 거죠. 물론 나중에 결과적으로 좋은 쪽으로 갔습니다. 그런데 보통 사람들은 문제에 노출이 되었을 때 문제를 보면 괴로우니까 술이나 영화, 가족들한테 푸는 식으로 문제를 희석시킬 수가 있거든요. 그러면 문제를 직면할 수 있는 기회를 놓치게 되는 거죠. 그러나 행자의 경우는 도망갈 데가 없고 결국은 자기가 그걸 볼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되어서 문제를 극복할 수밖에 없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부처님께서 ‘길들임의 단계경’에서 코끼리를 길들이려면 숲에서 빼내라고 하셨지요. 오갈 데 없이 만들어야 한다는 거죠. 마음이 지금까지 즐기던 감각적 욕망이 있는 곳으로 도망갈 데가 있으면 스스로 문제를 보지 않고 도망갑니다. 코끼리가 숲 속에 있으면 원래 즐기던 게 있으니까 아무리 길들이려 해도 금세 그 쪽으로 가버려요. 그런데 숲에서 빼내면 도망갈 데가 없어요. 시키는 대로 해야 먹을 수 있으니까요.
분명히 감각적 욕망이라는 것에는 즐거움의 요소가 있긴 있어요. 여러분에게 괴로움이 있을 때 감각적 욕망을 통해 행복을 잠시 느끼면서 해소하는 일종의 마취제 비슷한 거죠. 그런 게 분명히 있는데, 만약 감각적 욕망으로 피하기만 하면 절대 문제의 근원에 접근할 수 없어요.
-감각적 욕망이 행복이라고 여기는 데에는 어리석음이 숨어있다
그런데 감각적 욕망을 벗어난 즐거움이란 것이 있습니다. 부처님께서 감각적 욕망으로부터 벗어나서 오는 행복과 즐거움이 있다고 가르쳐주시면서 감각적 욕망이라는 것은 행복처럼 보이지만 실제 행복은 아니라고 하셨어요. 감각적 욕망으로 인해서 오는 여러 가지 고통이 있기 때문이에요. 행복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훨씬 더 많은 고통을 유발한다는 거지요. 부처님께서는 감각적 욕망은 짧게 즐겁고 오래 괴롭다고 하셨거든요.
감각적 욕망이 행복이라고 여기는 데에는 어리석음이 숨어있습니다. 감각적 욕망을 놓지 못하는 것은 행복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에요. 남이 뭐라고 하니까 잠시 참는 거지 행복인데 왜 놓느냐는 거죠. 감각적 욕망이 괴로움이고 뜨거운 불덩어리라고 생각하면 여러분 스스로 놓게 됩니다.
괴로움이라는 것에는 원하는 것이 있고, 원하는 것에는 반드시 어리석음이 숨어 있습니다. 괴로움을 행복이라고 생각하는 거죠. 부처님은 감각적 욕망이 괴로움의 원인이라고 했는데, 보통 사람들은 그 상황을 행복으로 잘못 아는 거지요. 진실을 잘못 아는 것을 어리석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런 어리석음을 발견하면 우리는 그로부터 벗어날 수 있습니다.
-견해에 대한 집착에는 어리석음이란 뿌리가 있다
고정관념을 통해 한 번 더 이야기해보겠습니다. 자신의 생각이 강하고 견해가 강한 사람을 제가 가르쳐보면 아무리 오랫동안 가르쳐도 결국 자기가 듣고 싶은 것만 듣더라고요. 정말 제가 전달하고자 하는 이야기는 안 듣고 자기가 듣고 싶은 이야기, 자기 나름대로 생각하는 견해와 부합하는 것만 듣고, 그것과 충돌이 일어나면 귀를 닫아버리는 거죠. 그러면 제가 전달하고자 하는 이야기를 반밖에 안 듣는 거죠. 이건 시간과 별 관계없는 것 같습니다. 몇 년이 지나도 똑같은 경우도 제가 봤거든요. 자신의 견해와 다른 이야기가 나오면 반발이 일고 마음으로 거부감이 일어납니다. 그 거부감이 바로 성냄입니다. 괴로움이고 불편한 거죠. 이런 불편함이 일어나는 건 자만 때문입니다. 집착도 여러 형태가 있는데, 자신이 잘났다거나 못났다고 하는 것에 대한 집착은 자만이라고 합니다. 자신이 남보다 낫다, 남보다 못하다, 동등하다, 당신이나 나나 무엇이 다르냐, 이런 생각이 다 자만에 속합니다. 자기가 가지고 있는 견해에 대한 집착을 보통 사견이라고 해요.
감각대상에 대해 집착하는 걸 탐욕이라고 하는데, 그 탐욕이 자신이 잘났고 못났고 동등하고 이런 데로 가면 자만이라고 하고, 견해로 가면 사견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이런 경우도 자기 견해에 대한 집착을 가지는 거지요. 그러면 이런 사견이 있기 때문에 반발심이 일어나는 거죠. 사견의 뿌리에는 자신이 가진 견해가 맞다는 생각과 자신이 가진 견해가 바로 자신의 것이라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사견 중에서 제일 대표적인 게 아견我見, 나라고 하는 것이 있다고 집착하는 거예요. 이건 내 것이다, 나의 자아다, 이런 형태로 나타나는데 내 것이라고 하는 생각도 자아가 있다는 개념이 바탕이 된 거죠. 내가 맞다, 내 것이 맞다, 내 견해다, 이렇게 생각하니까 그런 견해에 대한 집착이 일어나고, 진리를 모르기 때문에 그것에 집착하는 겁니다.
진리에 대해 제대로 알면 집착을 할 수가 없지요. 어떤 견해에 집착하는 뿌리에는 진리에 대한 무지, 내가 내 것이라고 생각하는 어리석음이 있는 것입니다. 진리의 입장에서 보면 견해가 자신의 것이라고 할 수도 없고 부처님께서는 견해도 조건지어진 거라고 하셨거든요. 내 것이라고 할 것도 없고 자아라고 할 것도 없는데 이걸 내 것이라고 생각하고 그것에 집착하는 거죠.
-어리석음을 보는 것이 지혜다
우리에게 일어나는 문제들을 분석해 보면, 그 속에는 모두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이라고 하는 이 세 가지가 계속 작용을 하고 있는 겁니다. 겉으로 드러난 게 탐욕이나 성냄의 형태이고 어리석음은 뿌리에 해당합니다. 성냄의 뿌리는 탐욕이라고 할 수 있고, 탐욕이 또 성냄의 원인이 되기도 하는데 기본적으로 성냄은 탐욕을 기반으로 하고 있습니다. 또, 탐욕이라고 하는 것은 어리석음을 기반으로 하고 있어요.
이런 구조만 여러분이 잘 이해하면, 아, 이런 걸 내가 잘못 알고 있어서 그랬구나, 내가 아무것도 모르고 잘났다고 생각했는데, 이제 보니까 뭘 모르면서 집착을 했구나, 진짜 어리석었구나, 이렇게 이해하면서 놓아집니다. 자신이 뭔가를 안다고 생각하고 지혜롭다고 생각하니까 안 놓는 거예요. 그래서 법구경에서 부처님께서 자신이 어리석은 줄 아는 사람은 진짜 지혜로운 사람이고, 자신이 지혜롭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진짜 어리석은 사람이라고 말씀하신 겁니다. 자신의 어리석음을 보는 그 자체가 지혜입니다. 어리석음이 있는지 없는지도 모르는 진짜 어리석음이고요. 어리석음의 본질은 바로 자신이 모르는 데 있습니다. 자신이 알면 어리석음이 아니죠. 어리석은지 그렇지 아닌지도 모르니까 어리석음이 되는 거죠.
-무상을 관찰하면 자만이 버려진다
우리한테 일어나는 괴로움이 다른 곳에 원인이 있는 게 아니라 여러분 마음속에 번뇌가 있기 때문입니다. 나무에 수액이 있기 때문에 찌르면 수액이 나오는 것처럼 마음속에 번뇌가 있기 때문에 외부자극에 의해서 괴로움이 발생을 하는 거예요. 자신의 문제로 환원해서 마음속에 괴로움이 일어날 땐, 첫째, 자신한테 화가 일어나는 거라는 걸 이해하고, 화라는 것은 분명히 내가 바라는 게 있기 때문이라는 것을 이해해야 합니다. 이것만 이해해도 어리석음까지 가지 않고 뭔가 원하는 게 있다는 것만 이해해도 웬만한 번뇌는 버려집니다.
이보다 더 깊이 들어가면 이런 탐욕에는 반드시 바탕에 무지가 있습니다. 진리에 대해서 제대로 알지 못하는 무지, 이건 결국 사성제나 연기에 대해서 바르게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는 거예요. 조금 쉽게 이야기를 하면, 자아가 없는데 자아가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첫 번째 무지에 해당합니다. 또, 괴로움인 것을 행복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대표적인 어리석음에 해당해요. 영원하지 않은 것을 영원하다고 생각하는 것도 대표적인 어리석음입니다.
특히 자만의 경우 이런 게 강해요. 자존심이 강한 사람은 옆에서 조금만 건드리면 굉장히 쉽게 화가 납니다. 자존심이 상당히 큰 문제를 일으켜요. 요즘 서울대에서 성추행 사건들이 많이 일어나는데, 그런 사람들의 공통된 심리현상이 보통 자신이 이렇게 하는 걸 상대가 좋아한다고 생각한대요. 심리적으로 자기는 위대하고 대단한 사람이기 때문에 자신이 이렇게 하는 걸 상대가 좋아할 거라고 생각하기 쉽다는 거예요. 이런 게 정말 말도 안 되는 자만이거든요. 자기가 잘났고 남보다 훨씬 우월하고 뛰어나다고 생각하는 거지요, 하지만 자신이 아는 것도 굉장히 조건지어진 것이고 실제 무상한 것입니다. 진짜 지혜로운 사람은 이게 변할 수 있다는 걸 알고 겸손하거든요. 그런데 이런 것들을 영원하고 자기가 영원히 잘났다고 스스로 착각하기 때문에 자만이 생기는 경우가 있어요.
자만은 무상을 관찰하면서 많이 없어집니다. 자신이 잘난 거나 부자이거나 좋은 위치에 있는 것이 오래 못 가고 일시적이고 영원한 것이 아니라는 걸 알면 쉽게 놓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런 게 영원할 거라고 생각하면서 집착을 하는 거죠. 그래서 온갖 어리석음들이 삶에 작용을 해서 여러분의 마음을 자꾸 병들게 만드는 거예요.
-이해하면 버려진다
말씀드렸다시피 괴로움을 행복으로 착각하는 것, 영원하지 않은 것을 영원한 걸로 착각하는 것, 또 자아가 없는데 있다고 착각하는 것이 대표적인 어리석음입니다. 나라는 것도 부처님은 감각접촉으로 인해 만들어진 개념이라고 하셨거든요. 그런데 관념적으로 만들어진 것을 우리가 어떤 실체로 이해를 한단 말이에요. 나라는 것이 있다고 생각하니까 내가 남보다 더 잘나고 더 오래 살아야 하고 더 많은 걸 가져야 하고 나라는 것에 집착하는 겁니다. 모든 뿌리가 여기 있거든요. 이제 이런 것들을 여러분이 이해하면 버려집니다.
억지로 버리려고 하면 절대 안 버려져요. 그래서 사성제에서 말하는 괴로움과 괴로움의 원인, 괴로움의 소멸 등을 이해하게 되면 자신이 버리려고 하는 게 아니라 그냥 어느 순간에 딱 버려지는 거예요. 자신의 문제인데 스스로 인정하지 못했다는 걸 받아들이는 순간에 신기하게 사라집니다. 자기가 문제를 스스로 이해해버리면 더 이상 그걸 붙들 수가 없어요.
-직관적으로 지켜보는 것과 반조하는 지혜를 계발하면 괴로움으로부터 멀어진다
이 공식은 굉장히 간단합니다. 어리석음을 바탕으로 탐욕이 일어나고, 탐욕이 일어나면 성냄이 일어난다는 건 내용은 간단합니다. 이걸 여러분의 삶에 적용해서 자신이 어디에서 막혀 있는지 찾아내고 이해하는 이 과정을 불교수행에서 반조, 조사하는 과정이라고 이야기 할 수있어요.
직관적으로 지켜보는 것과 반조하는 지혜, 이 두 가지를 여러분이 잘 계발하면 괴로움으로부터 멀어질 수 있습니다. 사실 이 공식이 경전에 명확하게 나와 있지는 않아요. 무명부터 시작해서 무명 때문에 행이 있고, 이렇게 가다가 갈애, 취착이라는 게 나와요. 무명 때문에 행이 있다는 말은 행에는 갈애와 취착도 들어가거든요. 그리고 또 갈애와 취착이라는 걸 통해서 나중에 괴로움이라는 게 발생을 해요.
-무명 때문에 탐욕이 있고 탐욕 때문이 성냄이 일어난다
이 전체 구조를 통합해 보면 구조적으로는 세 가지로 요약을 할 수가 있어요. 무명 때문에 탐욕이 있고 탐욕 때문이 성냄이 일어납니다. 물론 성냄이 있으면 또 그걸 벗어나고자 하는 욕구가 일어나기 때문에 성냄이 또 탐욕의 원인이 됩니다. 그렇지만 근본적으로는 이런 구조를 가지고 있어요. 여러분이 이걸 잘 이해하면 삶의 문제를 해결하는데 큰 도움이 됩니다. 이건 정말 부처님만이 파악할 수 있는 엄청난 가르침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요즘 심리학이나 심리치료는 대부분 성냄의 영역에 머무르고 있습니다. 현재 일어나는 스트레스와 괴로움을 완화시키는 데 머무르고 있지요. 근본적인 원인을 찾으려면 숨어있는 자기 욕구도 찾아야 하고 그것이 뭘 바탕으로 하고 있는지도 알아야 하는데 학자들로서는 종교적인 데 귀의해서 하기는 조금 힘들거든요. 그래서 한계가 있어요. 괴로움을 해소하는 게 현재 드러난 괴로움을 좀 완화시키고 표면에 크게 드러나지 않도록 하는 정도밖에 할 수 없다고 개인적으로 저는 그렇게 생각해요.
부처님께서는 우리에게 일어나는 근원적인 괴로움의 원인을 전부 파헤쳐서 여러분이 다시는 이런 괴로움에 노출되지 않는 정도까지 생각을 하신 거예요. 엄청난 거죠. 이런 가르침을 만났다는 것 자체가 여러분에게 큰 행운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걸 삶에 잘 적용해서 삶이 행복해지는 데 많은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오늘은 이것으로 마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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