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정관념을 버리면 지혜가 드러난다 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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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보림사 댓글 0건 조회 727회 작성일 21-03-19 11:40본문
〈고정관념을 버리면 지혜가 드러난다 上〉
우리는 자신의 생각과 나름대로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살아가면서 서로 생각들이 서로 부딪쳐서 괴로움을 겪는 일들이 많아요. 우리의 생각을 일종의 고정관념이라고 이야기할 수도 있는데, 고정관념이 확정된 견해나 나름대로 세상을 바라보는 견해들로 발전합니다. 그 실체가 무엇인지 한 번 생각해보고 어떻게 벗어나는지 그 방법에 대해서도 같이 이야기를 해보겠습니다.
-개념화의 편리함과 편견
먼저 불교의 중요한 주제 중 하나가 관념이나 개념이라고 하는 것과 실상이라고 하는 것의 차이예요. 이 세상에 존재하는 사물들은 모두 나름대로의 모습을 가지고 살아가고 존재하는데, 거기에 우리는 적당한 이름을 붙이고 그 이름을 통해서 소통을 하는 거죠. 그래서 실상이라고 하는 이름도 필요 없고 그것 자체의 모습 그대로 존재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다른 사람들과 대화를 하거나 무언가 전달하거나 소통하기 위해서는 언어라는 것이 굉장히 중요해요. 그래서 이것은 무엇이라고 부르자고 이름을 붙이게 됩니다. 이건 컵이라고 하자, 이건 시계라고 하자, 이건 녹음기라고 하자 등 이렇게 나름대로 이름을 붙입니다. 이렇게 사회적인 합의를 통해서 이름을 만들어내는 거죠.
이름을 붙이면 소통하는 데 편리하기는 해요. 하지만 언어로 개념화되면서 우리가 사물을 볼 때 언어에 의지해서 사물을 보면 그 사물이 존재하는 실상을 그대로 보지 못하고 언어라는 장벽이 생겨 오히려 편견을 만들어낼 소지도 많아요. 실제로 개념들이 만들어지면 그 개념에 지배받는 것이 굉장히 많아집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에 대해 그 사람의 성격은 이렇다고 규정하는 거죠. 그 사람이 실제로 다른 모습을 많이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지요. 또 요즘 세상은 기독교와 이슬람의 투쟁이라고 봐도 과언이 아닌데 종교라는 틀 속에서 옳다고 생각하는 것을 배우고 이것이 맞고 옳다고 확정해서 그것과 다른 것들을 적으로 간주하고 공격하고 죽이고 테러를 가하는 일들이 빈번하게 발생을 하고 있습니다.
-고정관념이라는 장벽
이런 것들은 알고 보면 생각의 차이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현실에서는 사람을 죽이기도 하고 살리기도 하는 무지막지한 결과를 초래하기도 하지요. 관념이나 개념이 별것 아닌 것 같지만 현실세계에서 굉장히 큰 영향을 미치기도 합니다. 생각의 차이 때문에 사람을 죽일 정도로 강력하게 나타날 수 있는 거죠.
한 사람을 이름으로 규정하는 순간부터 이름이라는 것이 큰 장벽이 돼 그 사람의 본래 모습을 가리게 되죠. 우리나라에도 이런 일이 많습니다. 제가 가끔 지하철을 타고 가다보면 저한테 와서 팸플릿 같은 것을 주는 사람들이 많거든요. 예수님 믿고 천국 가세요, 이러면서 주는 사람도 있는데 단지 제가 스님이고 다른 종교를 가지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적대감을 표하는 사람도 있어요. 어떤 성품을 가지고 있는지 이런 건 별로 관심 없고 겉으로 드러나는 모습과 스님이다, 목사님이다 이렇게 이름으로 규정된 것으로 사람을 평가하지요. 스님들 중에서도 아주 훌륭한 사람도 있는데 자신의 생각과 다른 것이 있으면 그것만으로도 적대감을 갖도록 작용할 수 있다는 거예요. 그래서 관념이라는 것이 굉장히 무서운 측면이 있습니다.
-실제 모습을 보는 것이 중요하다
여러분이 어떤 사람을 볼 때 고정관념을 가지고 본다면 그 사람의 진짜 모습을 잘 못 보는 경우가 많아요. 누구한테 나쁜 이야기를 들은 사람을 만난다면 이미 그 생각이 앞서게 되어 그 사람이 진짜 어떤 사람인지를 보기 전에 먼저 삐딱하게 보게 되잖아요. 그래서 불교에서는 이런 것을 벗어나야 한다고 이야기합니다. 겉으로 드러난 개념이나 형태, 모습, 껍데기를 보는 게 아니라 그 사람이 가지고 있는 또는 사물이 가지고 있는 실제 모습을 보는 것을 아주 중요한 주제로 삼고 있지요.
사회적 합의에 의해서 이름을 붙인 것을 개념이라고 해요. 전문용어로 빤냐띠 paññatti라고 하죠. 임시로 만들어놓은 관념적인 형태라는 거예요. 이런 개념에 의해서 우리는 굉장히 많이 규제가 되고 통제가 됩니다.
그 다음에 개념을 보지 않고 실제 이름 붙이기 전, 이름을 붙이든 안 붙이든 그 사물이 존재하는 모습이 있지요. 이걸 법이라고 합니다. 불교에서 법이다, 법을 알아야 한다, 법을 봐야 한다고 말하는 내용들입니다. 이름 붙여진 것이 아니라 이름이 붙여지기 이전에 그 사물이 존재하는 모습을 법이라고 이야기하는 거죠. 위빠사나 수행, 불교에서 말하는 수행은 이런 법을 보는 겁니다. 관념을 벗어나서 이름 붙이기 전에도 존재했고 이름을 붙이든 안 붙이든 존재하고 있는 모습들을
보는 거지요.
우리가 녹음기라고 이름붙인 것이 있지만 그 이전의, 이름을 안 붙이더라도 물질로서 가지고 있는 성질들이 있잖아요. 무거움이라든가 가볍다거나 단단하다 뜨겁다 차갑다 이런 것들은 사물에 이름을 붙이든 안 붙이든 사물이 가지고 있는 속성이라는 거죠. 이름이라는 것은 편의상 붙인 것인데, 오히려 그 이름 때문에 인식에 방해를 받고 제대로 보지 못하는데 그런 것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것이 중요한 수행의 주제입니다.
-견해에 대한 집착의 위험
특히 이름도 이름이지만 이런 이름을 통해서 생각들과 어떤 개념들이 자꾸 반복되고 이어지다 보면 그 개념들에 의해서 생각들의 고착화가 시작됩니다. 생각이 고착화되면 우리 삶에 상당히 많은 영향을 미치면서 지배적으로 존재하지요. 이런 걸 견해에 대한 집착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실제 진실인지 아닌지도 확인되지 않은 상태에서 자기가 가진 견해에 집착하고 그것만이 옳고 자기와 다른 것에 대해서는 귀를 닫아버리는 것이죠. 이렇게 되는 것이 가장 위험한 상태라고 할 수 있어요. 오늘은 여기에 포커스를 맞춰서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사람마다 자라온 환경이 다르고 세상을 보는 눈도 달라 생각의 차이가 생기는데 자신이 세상을 보는 방식만 맞고 그것만이 옳다고 하고 다른 것을 틀렸다고 하는 이런 게 제일 큰 문제가 됩니다. 그리고 이걸로 끝나는 게 아니라 자신과 다른 것을 공격하고 파괴하는 데까지 갈 수도 있는 거죠. 이렇게 어떤 견해에 대한 집착을 사견이라고 합니다. 검증되지도 않고 옳지 않은 견해에 대해서 집착하는 걸 사견이라고 하는 거죠.
사견이 강해지면 소통하기가 굉장히 어렵습니다.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견해를 틀을 만든 다음에 그 틀과 다른 것들을 받아들이지 않으려고 하겠죠. 더 나아가면 아까 말씀드렸듯이 자신과 다른 것을 공격한다거나 파괴하고 자기의 생각으로 끌어들이려고 하는 강제를 하는 거죠. 자신의 생각을 따르도록 강압을 하기가 쉬워요. 그래서 견해에 집착하는 것이 자기만 괴롭히는 게 아니라 주위사람들까지도 상당히 피곤하게 합니다. 지혜롭게 잘 형성된 견해라면 괜찮은데 이게 아니라 자기 식으로 만들어진 견해는 상당히 위험하고 다른 사람들에게 피해도 줄 수 있다는 거죠.
-삿된 견해로부터 벗어나는 것이 첫 번째다
불교수행에서 깨달으면 괴로움으로부터 벗어나게 되죠. 불교는 한마디로 괴로움과 그 괴로움으로부터 벗어나는, 즉 괴로움의 소멸을 이야기하는 종교입니다. 이것을 우리나라에서는 이고득락離苦得樂이라고 하죠. 이별하다 ‘이’, 괴로울 ‘고’예요. 괴로움으로부터 이별하고 벗어나서 ‘득락’, 얻을 ‘득’, 행복할 ‘낙’이지요. 여기서 행복은 일반적인 행복이 아니라 진정한 행복입니다.
괴로움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을 우리가 깨달음이라고 이야기하는데, 첫 번째 깨달음을 수다원이라고 합니다. 입류入流, 성인의 흐름에 들어갔다는 말이지요. 두 번째는 일래과一來果라고 하고 세 번째는 불환不還, 다시는 욕계로 돌아오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네 번째는 아라한으로 완전히 깨달음을 얻습니다.
첫 번째 깨달음에서 제일 중요한 게 이러한 견해로부터 벗어나는 것이에요. 부처님께서 우리가 괴로움으로부터 벗어나는 첫 번째 관문으로 삿된 견해로부터 벗어나는 것을 제시하셨습니다. 삿된 견해를 갖고 있는 한 바른 길로 갈 수 없다는 거예요. 자기가 이 길이 맞다고 확정하고 다른 걸 들으려고 하지 않으면 아무리 옆에서 지혜로운 사람들이 문제가 있으니 다시 한 번 생각을 하라고 이야기를 해도 그 말을 듣지 않습니다. 마치 잔에 물이 꽉 찬 상태에서는 다른 물을 부을 수 없는 것처럼 자기 생각에 꽉 차 있는 사람은 아무리 지혜로운 사람이 진리를 이야기해줘도 받아들이지 않고 배척하게 되는 거죠. 그래서 수행의 길에서 첫 번째로 우리가 벗어나야 될 관문이 바로 이런 사견, 삿된 견해로부터 벗어나는 겁니다.
-삿된 견해의 해악들
삿된 견해의 피해는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 예를 들어 지금 아주 극단적인 이슬람 종교 쪽의 사람들은 자신들과 생각이 다른 사람들에게 테러를 가하면 자신들이 천국에 간다고 생각하잖아요. 그런데 실제로 그런 것이 가능하겠습니까. 이건 그 사람들의 그릇된 믿음이고 그릇된 견해일 뿐입니다. 사람을 죽이고 살아있는 생명체를 괴롭히고 죽이는데 논리적으로 어떻게 그게 가능하겠어요. 부처님께서는 이런 걸 마치 물에다가 바위를 가라앉혀놓고 사람들이 종교적인 신념을 가지고 바위에게 떠오르라고 하는 것과 같다고 비유로 말씀하셨어요. 그 바위가 떠오르는 그런 일은 없는 것처럼 그렇게 나쁜 짓을 하고 남을 헤치고 죽이는 사람들이 종교적인 믿음만 가지고 죽으면 천국에 간다고 생각한다고 천국에 가는 게 아니라는 거죠. 자기가 지은 악행의 결과로 지옥에 가거나 고통을 받게 되지 남을 헤치고 죽이고 어떻게 좋은 데 갈 수 있겠어요. 이런 게 다 그릇된 믿음을 바탕으로 한 거예요. 이런 그릇된 믿음이 얼마나 위험한지 우리가 눈으로 보고 있는 거잖아요. 잘못된 견해 때문에 말도 안 되는 일들이 벌어집니다.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아이들에게 잘못된 견해를 심어줘 테러에 이용하고 이렇게 될 수 있는 거죠.
이렇게 사견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 삶에 굉장히 많은 영향을 미칩니다. 대표적으로 자살을 들 수 있어요. 자살을 택하는 사람들은 죽으면 모든 고통이 끝난다고 생각하거든요. 현실이 힘드니까 죽으면 모든 게 끝난다고 생각하고 죽음을 택하는 게 일반적으로 자살한 사람들의 심리라고 할 수 있어요. 그런데 부처님은 이것을 그냥 갈애에 불과하다고 말씀하셨어요. 열망에 지나지 않고 실제로 죽는다고 해서 다시 안 태어나지는 게 아니라는 거예요.
정말 안 태어나고 싶으면 아라한이 되어야 합니다. 아라한이 되지 않은 사람, 수행을 통해서 자기 번뇌를 소멸해서 아라한이 되지 않은 사람은 다시 안 태어날 수 있는 방법이 없습니다. 자신의 업이 남아있고 갈애가 남아있는 사람은 아무리 열망한다고 해도 안 태어나지는 게 아니라는 거죠. 업에 의해서 태어날 수밖에 없다는 거예요. 괴로움으로부터 피하려고 죽음을 택했지만 오히려 더 큰 고통이 기다리고 있을 수 있습니다.
보통 세상에 대한 불만족과 괴로움 때문에 자살을 택하게 되는데 그럴 경우 죽을 때 화를 가지고 죽는 거나 다름없거든요. 그런 경우 불교적인 관점에서 봤을 때 악처에 태어날 위험이 많습니다. 그러면 이 사람은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해 죽음을 택했지만 결국은 괴로움을 벗어나는 게 아니라 더 큰 괴로움에 직면할 수 있다는 겁니다. 쓰레기차 피하려다 똥차에 치인다는 어릴 때 쓰던 농담처럼 말이지요. 물론 다른 이유로 그렇게 할 수 있는 사람들이 있어요. 아라한들이 할 일도 다 끝냈고 중병이 들어 더 이상 살아있는 게 의미가 없을 때 가끔 경전에 보면 자살을 택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런데 이건 전혀 다른 경우입니다.
사는 게 힘들어서 죽으면 다 끝난다고 생각해서 죽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자신이 살아온 흔적이고 과거에 지었던 과보 때문이라고 생각하고 그걸 견뎌내야 됩니다. 인욕하고 참아냄으로써 괴로움이 영원한 건 아니니 잘 참아서 넘어가면 다음에 또 좋은 날이 온다고 생각하고 견뎌내야지요. 자기가 어차피 받아야 될 거거든요. 받아야 될 거는 받는 것이 바람직한 거예요.
잘못된 견해를 가지는 것은 작은 일이 아닙니다. 예를 들어 이생에서 여러분들이 아무 생각 없이 잘못된 사람이나 잘못된 가르침을 접해서 사람을 죽여도 괜찮다거나 하는 이상한 견해를 가져 사람을 죽이면 이생에서 끝나는 게 아니라 두고두고 그 과보를 받아야 된다는 거예요. 잠깐 한번으로 끝나는 게 아닐 수도 있어요. 잘못된 견해를 가지는 게 엄청나게 위험한 일일 수 있다는 거죠. 실제로 여러분들 주위에서 볼 수도 있습니다. 사이비종교에 빠져 패가망신하고 한 생을 허무하게 보내는 경우도 있거든요. 예전에 제가 출가하기 전에 친구가 하나 있었어요. 혹시 휴거라고 들어보셨어요? 그 친구가 휴거단에 속해 있었는데 저는 그걸 몰랐어요. 그 친구가 한 번 같이 가보자고 해서 갔는데 건물 지하실에 약 30명 정도가 가족단위로 모여 앉아 있었어요. 며칠 있으면 휴거라며 아이들을 다 퇴학을 시킨 거예요. 이제 여기 있어봐야 할 일도 없고 애들은 다 퇴학시키고 거기서 기도하고 있는 거예요. 그걸 보고 어떻게 이런 바보 같은 짓을 할 수 있는지 정말 황당하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자신은 그렇다 쳐도 어린애들이 무슨 죄가 있어요. 부모 잘못 만나서 애들이 학교를 그만두고, 좀 있으면 천국에 올라간다고 앉아서 하루종일 기도하고 있잖아요. 그 사람들은 재산도 다 갖다 바쳤을 가능성이 많습니다. 사실 주위에 이런 말도 안 되는 견해에 빠져 인생을 망치는 사람들이 많이 있거든요. 한 번 잘못 들어가게 되면 굉장히 크게 위험한 것들이 많습니다.
어떤 전도사가 돌아다니면서 2014년에 전쟁이 일어난다고 빨리 피하라고 해서 한국을 떠나 이민 간 사람들이 있었다는 뉴스를 봤습니다. 이런 게 다 잘못된 견해로 인해 일어나는 일들이에요. 잘못된 견해라는 게 아무것도 아닌 것 같아도 삶에 굉장히 지대한 영향을 미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그릇된 견해에서 벗어나는 건 정말 중요합니다.
이렇게 극단적인 부분도 있지만, 극단적이지 않더라도 너무 자기 생각이 강한 사람들은 주변에서 인간관계를 하기가 힘듭니다. 왜냐하면 자기 견해하고 조금만 다르면 화를 내고 공격하고 부딪치니까 관계를 풀어나가기가 굉장히 어렵거든요. 그러니 잘못된 견해를 가진다는 것이 얼마나 우리 삶에 많은 영향을 미치는지 잘 자각해야 합니다.
경전에서 부처님께서는 사견을 가장 비난받아야 할 것이라고 말씀하셨어요. 삿된 견해로 인해서 우리 삶에 오는 위험이 너무 많고 또 그것으로 인해 주위에도 피해를 주는 게 많거든요. 그래서 부처님께서 항상 ‘이 사람은 정견업을 지어서 선처에 태어났다.’, ‘이 사람은 사견업을 지어서 악처에 태어났다.’ 이런 관점에서 윤회를 말씀하셨습니다. 그만큼 삿된 견해라고 하는 것이 가지고 있는 위험성이 많다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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